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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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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일까?

우리는 중학교때부터 아주 커다란 중점을 두고 영어를 배워왔다.

열심히 해서 제법 어려운 단어들도 외웠고, 독해에 능숙해졌으며 토익을 통해 문법도 상당한 능력으로 끌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왜 대화는 여전히 불가능한 것일까?

언어소통은 영어로 communication이라고 한다.

그 어원이 [나누다]라는 라틴어인데 나누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자와 수동적인 행위자가 있는 것이다. 언어소통이란, (말을) 주는 사람(= speaker) + 받는 사람(= listener)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언어소통을 위해서는 말을 주는 단계의 연습과 받는 단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우리가 한국에서 배웠던 영어라는 언어의 학습은 말을 주는 것과 받는 것의 연습이 아닌 말의 성문화(codification)만을 배웠던 것이다. 말은 결국 소리를 주고 받는 과정이어야 하는데 우리네의 외국어 학습에는 소리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슨 말인지 조금 이해가 되시려나?

우리는 말의 연습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글부터 배웠으니 이거야말로 뼈대없이 시멘트로 건물을 세우는 격 아닌가? (무슨 문제인가?라고 생각해보시는 분들은 모국어를 익힐때 우리가 언어를 배우는 순서를 생각해보시라. 보통의 경우에는 말을 하는 단계 이후에 글을 배우는 것이 순서이다.)

그리고 언어 학습에 대한 사고가 문제이다.

대부분의 언어 교육에 반영된 사고는 바로 <글을 가르친다 = 말을 배우다>라는 명제와 <글을 이해를 시켰다 = 학습자가 언어에 반응할 것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전제를 두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말씀 드렸다시피 언어는 소리에 반응을 해서 이뤄지는 소통수단이다. 소리에 대한 개념이 전무한채 글을 깨우친 후 소리를 내는 연습을 하는 단계까지 넘어가기 전에 글을 깨우치며 대부분의 학습자는 지치지 않을까?

그리고, 글을 가르치는 중간에 <언어소통>을 병행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의견 또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우리가 그 소리를 듣는데 너무 익숙지 않으며 동시에 그 소리에 반응하기에 너무 무방비라는 것이다.

복싱을 할때 링위에서 한대 맞으면 다음엔 피하고 반응해서, 상대방에게 펀치를 날려야 하는데 우리는 갑자기 영어라는 소리가 우리에게 반응하면 그 선빵 한번에 knock-out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반응하기에는 너무 무방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린 선빵의 의미가 얼마나 큰지 대략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_-ㅋ) 하지만 그나마 선빵을 날렸다해도 다시 돌아오는 펀치가 블로우 펀치가 될 확률도 높으니 이미 게임은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학습자(learner)로서의 외국어를 통한 언어소통에 대한 학습의 옳바른 마음가짐이란 어떤 것일까?

첫째, 우선 반응을 하기 위한 연습이 필요하다.

언어소통은 주고 받기가 필요한 일종의 게임이다. give and take가 분명하지 않으면 give는 지쳐서 먼저 자신의 발을 뺄 것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반응을 위한 연습이 필요하다. 반응이라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hello라고 했으면 나도 hello라고 해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그것인데...

친숙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에 살며시 웃어주면서 조금씩 반응하고, 외국인에게 친숙해지는 것도 외국어 대화를 일종의 과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자신을 낯선 환경에 두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낯선 환경에서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100% 꺼낼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을 확실히 꺼내도록 부끄러움을 제거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이 부분에선 정말 한국인의 문제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한국인에게 외국어를 배우는데 있어서 가장 치명타가 되는 부분이 바로 부끄러움이며, 완벽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나서는 것이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영어라는 외국어를 완벽하게 하고 싶어하는 갈망이 굉장히 크다. (그것은 모두에게 자신을 돋보이고 싶어하는 경향이 유독 높은 한국인만의 고유성향에서 나오는 굉장히 결과물일테다.)

아무튼, 그것의 완벽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그때서야 자신을 끄집어 내면 된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잘하기 직전까지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연습을 하지 않는다는 말일테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완벽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노력해나가는 것인데 완벽해지기까지 노력을 하는 과정이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어진 모두의 사고방식 말이다. 노력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음을 깨닫고 떠난 외국에서 결국 완벽에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연습할 수 없는 상황을 상기하여 연습을 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체계적인 교육체계는 학습자에게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여주는 것이지, 더 많은 지식을 전달하여 주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지식은 학습자가 학습에 대한 흥미를 느낀 후부터 무궁무진하게 키워낼 수 있는 부분이며 그 크기는 전적으로 학습자의 몫이지, 교육자의 전달양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완벽을 키워내는 학습은 학습을 장려해주는 환경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독려해주며, 서로가 학습과 언어소통에 있어서 dialogue의 role-player가 되어줌이 얼마나 큰 일인지를 알게 되어야 할 것이다.

비단 외국어뿐만이 아니겠지만 진정으로 갈급해하는 사람만이 노력하고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분위기 탓하면서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서 학습 환경에 대한 제한을 두고, 그 선 밖은 밟지도 않으려는 많은 한국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두서없이 몇자 적게 되었다.

한국말만 주구장창 하면서 "자신은 어학연수 와서 최선을 다 했는데 늘지가 않는다..."라는 말을 한 어떤 친구에게 최선을 다 했다면 분명 미세한 변화라도 느꼈을 것이라고 이렇게 글에 소심히 남기면서 글을 마친다.

고통없이 대가를 얻으려는 오만한 사람에겐 꿈이 필요없다.

꿈은 이루려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니까 말이다.

Dreamer과 Daydreamer는 둘 다 꿈 꾸는 사람이지만

단지 한끗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이루려는 의지와 그 과정에 대한 성실한 노력을 동반하는 사람인지,

어떠한 노력에 대한 생각없이 달콤한 결과만을 생각하는 사람인지..

단지 그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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